부부는 ‘남남’이다
부부란 아무리 친해져도 ‘남남’이란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좋은 말씀으로 꽉 찬 기독교의 성서에도, 부모자식은 수족과 같은 존재이나
아내는 의복과 같은 존재라는 말씀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말이 쓰여진 가부장시대의 문화를 감안하여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남자에게 아내만이 아니라 여자에게 남편도 의복과 같은 존재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족과 의복의 차이는 자명하다. 수족은, 설사 그것이 가장 하찮은 손가락 하나라 할지라도, 함부로 잘라내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의복은 맘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갈아입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제 삶에서 부모 자식 사이에 관계를 끊는 일은 거의 목격할 수 없는 데 비하면, 이혼이나 파혼이나 연인 사이의 이별 같은 것은 꽤나 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이별이나 이혼 같은 게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별에는 얼마나 큰 고통과 경제 사회적 부담이 따르는가.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인간적 가치가 파괴되는 데 따른 고통일 것이다. 그러니 배우자란, 평생을 입기로 작정한 의복이라 생각하고 아예 벗어 던질 생각을 안하는 게 상책중의 상책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헤어지지 않는다는 맹세를 했다 하더라도, 상대를 “가만히 두어도 변하지 않는 존재”로 마냥 믿어 서로에 대한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차라리 서로 작별하여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느니만 못한 ‘고문’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인간관계에 비하여 부부관계가 갖는 가장 큰 특성은, 두 사람이 동거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만 생식활동을 갖는다는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사이에 다른 누구를 끼워서 함께 살거나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갖는 일도 따지고 보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상식이나 보편적 도덕율에 어울리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서로 이러한 도덕적 사회적 의무관계에 있는 것을 명분으로 상대로 하여금 절대 외도를 찾지 못하도록 강제하면서 그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성생활을 등한시하여 상대로 하여금 심신의 불만과 외로움을 겪게 한다면 이것도 그리 윤리적인 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생활을 등한시하면서도 서로가 충분히 양해하고 어느 쪽이든 큰 불만이 없는 경우라면 굳이 윤리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쪽의 소극적 태도로 인하여 섹스리스 상황이 상대에게 강요되는 경우라고 한다면 성을 기피하는 쪽은 한번쯤 심각하게 그런 생활의 윤리적 정당성을 반성해볼 필요도 있다.
부부간의 불화나 이혼들도 대체로 어느 한쪽에 의해 강요된 금욕생활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정인데, 성생활이 만족스러운 관계의 부부들은 여간해서 서로 헤어지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모두 성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생명이란 자체가 끊임없는 음과 양의 교류에 의해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욕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 일어나야 정상이고, 건강할수록 그것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런 욕구가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 점점 약화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친숙해져서 서로에게 이성으로서의 자극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본래 음과 양이 서로를 다른 것으로 느낄수록 더욱 강하게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지 않은가. 부부는 가족이기 때문에 성적 흡인력이 점차 약화될 수 있으나, 근원적으로 서로 남남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배우자에게 여전히 자극적인 이성(異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좀더 매력적인 이성, 좀더 능력이 있는 이성으로서 남편이든 아내든 자기 배우자를 설레게 할 수 있는 ‘자기관리’야 말로 가장 사이가 깊은 연인으로 평생을 해로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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