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과 여

[스크랩] 부부는 ‘남남’이다

bizmoll 2009. 1. 14. 00:48

부부는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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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아무리 친해져도남남이란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좋은 말씀으로 꽉 찬 기독교의 성서에도, 부모자식은 수족과 같은 존재이나

아내는 의복과 같은 존재라는 말씀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말이 쓰여진 가부장시대의 문화를 감안하여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남자에게 아내만이 아니라 여자에게 남편도 의복과 같은 존재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족과 의복의 차이는 자명하다. 수족은, 설사 그것이 가장 하찮은 손가락 하나라 할지라도, 함부로 잘라내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의복은 맘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갈아입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제 삶에서 부모 자식 사이에 관계를 끊는 일은 거의 목격할 수 없는 데 비하면, 이혼이나 파혼이나 연인 사이의 이별 같은 것은 꽤나 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이별이나 이혼 같은 게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별에는 얼마나 큰 고통과 경제 사회적 부담이 따르는가.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인간적 가치가 파괴되는 데 따른 고통일 것이다. 그러니 배우자란, 평생을 입기로 작정한 의복이라 생각하고 아예 벗어 던질 생각을 안하는 게 상책중의 상책이다
.

하지만 제아무리 헤어지지 않는다는 맹세를 했다 하더라도, 상대를 가만히 두어도 변하지 않는 존재로 마냥 믿어 서로에 대한 성의를 다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차라리 서로 작별하여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느니만 못한고문이 될 수도 있다
.

다른 인간관계에 비하여 부부관계가 갖는 가장 큰 특성은, 두 사람이 동거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만 생식활동을 갖는다는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사이에 다른 누구를 끼워서 함께 살거나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갖는 일도 따지고 보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상식이나 보편적 도덕율에 어울리는 일은 아니다
.

그런데, 서로 이러한 도덕적 사회적 의무관계에 있는 것을 명분으로 상대로 하여금 절대 외도를 찾지 못하도록 강제하면서 그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성생활을 등한시하여 상대로 하여금 심신의 불만과 외로움을 겪게 한다면 이것도 그리 윤리적인 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생활을 등한시하면서도 서로가 충분히 양해하고 어느 쪽이든 큰 불만이 없는 경우라면 굳이 윤리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쪽의 소극적 태도로 인하여 섹스리스 상황이 상대에게 강요되는 경우라고 한다면 성을 기피하는 쪽은 한번쯤 심각하게 그런 생활의 윤리적 정당성을 반성해볼 필요도 있다
.

부부간의 불화나 이혼들도 대체로 어느 한쪽에 의해 강요된 금욕생활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정인데, 성생활이 만족스러운 관계의 부부들은 여간해서 서로 헤어지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모두 성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생명이란 자체가 끊임없는 음과 양의 교류에 의해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욕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 일어나야 정상이고, 건강할수록 그것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

이런 욕구가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 점점 약화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친숙해져서 서로에게 이성으로서의 자극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본래 음과 양이 서로를 다른 것으로 느낄수록 더욱 강하게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지 않은가. 부부는 가족이기 때문에 성적 흡인력이 점차 약화될 수 있으나, 근원적으로 서로 남남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배우자에게 여전히 자극적인 이성(
異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좀더 매력적인 이성, 좀더 능력이 있는 이성으로서 남편이든 아내든 자기 배우자를 설레게 할 수 있는자기관리야 말로 가장 사이가 깊은 연인으로 평생을 해로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일소일빈
글쓴이 : 털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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